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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9. 19世 〉41. <부정공>우겸배유인김해김씨묘표(友謙配孺人金海金氏墓表)
1. 문헌 목록 〉19. 19世 〉43. <태사공>충의장노송공휘시영묘갈명(忠義將老松公諱時泳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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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광양공>학생공휘성순묘표(學生公諱成淳墓表)
학생공휘성순묘표(學生公諱成淳墓表) 공의 휘(諱)는 성순(成淳)이요 자는 윤후(允后)이신데 옥천인(玉川人)이다。 고려(高麗)때 검교 대장군 휘 장(璋)을 시조로 하는데 三대를 내려와 휘 원길(元吉)은 호가 농은(農隱)인데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봉해지고 시호(諡號)가 충헌(忠獻)이시다。 이후의 혁혁한 세덕(世德)은 명현(名賢)과 석학(碩學)들이 지은 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중복하여 기록하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휘는 신해(信海)요 아버지의 휘는 득명(得命)인데 모두 학행(學行)과 경학(經學)으로 도덕 군자라는 칭송이 높았으며 어머니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정숙(貞淑)하고 부덕이 있으셨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장성하여서는 풍채가 늠름하고 재기(才器)가 총명하였다。 스승을 찾아가 학문에 전념하였는데 스승이 말씀하시기를 내 문하(門下)의 수제자(首弟子)이다。 그 조예(造詣)의 독실함은 과거(科擧)에 합격한 사람들과 함께 논할 바가 아닌 실로 사문(斯文)의 군자이다라고 칭찬하였다。 특히 근사록(近思錄)과 성리대전(性理大全)、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재미를 붙여 그 이치와 연구하는 방법을 깨달았으며 수신(修身)의 요체(要諦)로 삼아 실천하고 몸소 행하였다。 선대로부터 전해오는 시례(詩禮)를 가법(家法)으로 삼고 효우(孝友)를 가훈으로 삼아 자손에게 모범을 남긴 것이 공의 독실한 행실이다。 어려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불운(不運)하여 합격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담당자들이 공정하지 못한 소치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공은 큰 재주와 훌륭한 포부를 지닌채 초야(草野)에 묻혀 지내다가 년 二월 九일에 돌아가시니、 천도(天道)가 무심하다고 하겠다。 묘소는 곡성 오곡면(梧谷面) 쌍구(雙龜) 상어인동(上於仁洞) 손좌(巽坐)이며 배위 해주오씨(海州吳氏)는 부좌이다。 三남을 두었으니 창옥(昌玉) 중옥(重玉) 자옥(自玉)인데 자옥은 효행(孝行)과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통훈대부(通訓大夫) 승정원 우승지(承政院右承旨)에 추증되었으며 증손자 상록(相祿)은 벼슬이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 부호군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 겸오위장(兼五衛將)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에 추증 되었으며 현손 동혁(東爀)은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으로 가선대부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五세손 상훈(尙勳)은 육사(陸士)를 졸업하고 육군 중령(中領)이다。 공의 독실한 덕행과 아름다운 행실이 이러하니 어찌 후손들이 복록(福祿)을 누리지 못하겠는가。 백세 후에도 공론(公論)이 사라지지 않으리니 공을 현창(顯彰) 해 줄 훌륭한 군자가 있을 것이다。 五세손 상훈이 비문을 간청하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이상과 같이 쓴다。 西紀一九八五年 四月 日 豊壤後人 趙南赫 짓고 씀 五代孫 尙勳 삼가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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